NGO활동

[태국 메솟의 버마 난민촌 방문기]

부천시민신문 2006. 7. 28. 14:28

“퇴로 없는 국경지대 사람들-그래도 파랑새는 있다(2)”


메타오 학생들의 민속공연, 그리고 환영만찬

방문단과 학교 관계자들의 기념촬영

교실 2개를 털어 꾸민 만찬장 및 공연장. 학생들이 공연을 기다리고 있다. 벽에 붙어 있는 초상화는 버마 황제이다. 


그날 밤, 메타오고등학교에서는 거의 1년여만에 다시 찾은 한국인 방문단을 위해 오랜만에 성대한 공연과 환영만찬이 마련되었다. 물론 식사 준비에 필요한 비용 6천 바트(태국 화폐, 한화로 약 15만원)는 전액 방문단에서 지불하였다.

같은 아시아인으로 적극적인 지원을 자청하고 나선 ‘오! 필승, 코리아’인들에게 고마운 마음 가득 담은 대접을 하고 싶은 그들의 마음과 정성은 받고, 방문단은 메타오高의 선생님과 학생들, 그리고 주변 학교에 근무하는 몇 분 선생님들을 위해 전혀 아깝지 않은 약간의 지출을 하였다. 한국 돈으로는 그리 많지 않은 비용으로 그 자리에 모인 1백여명의 인원이 모두 만족한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저녁 6시쯤, 예정된 시간에 도착해 보니 교실 2개는 벌써 하나로 합쳐져 공연장으로 탈바꿈해 있었고 책상과 의자는 모두 밖으로 옮겨 가지런히 정돈돼 있었다.

드디어 7시쯤 행사는 시작되었다. 첫 공연으로 민속의상을 입은 남·여 16명이 경쾌한 리듬의 노래와 악기 연주에 맞춰 춤을 추었다. 남자들은 파란색 치마에 파란색과 흰색이 섞여 있는 머리띠를 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노란색 치마에 검정색 블라우스를 입고, 노란 머리띠를 둘렀다. 남자들은 맨발이었지만 여자들은 양말을 신었다.

 

춤에 맞춰 노래를 불러주는 소녀들. 옆에 보이는 북은 마치 우리나라의 북과 비슷하다.

버마어로 소개되는 내용을 알 수는 없었지만 청순한 남녀간의 사랑을 노래하듯 남녀가 어울려 추는 춤은 순박하고 낭만적인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성을 그대로 표현하는 듯 했다.

 

 

 

두 번째 역시 파란색 치마에 흰색 블라우스를 입은 소녀 8명과 파란색의 민족의상을 입은 남학생 8명의 춤을 선보였다. 처음 공연을 했던 학생들보다는 조금 나이가 많아 보였고, 남자는 양말을 신고 여자들은 벗은 것이 특징이었다. 그 차이에 대해서는 설명을 듣지 못했다.

그곳의 학생들이나 교사, 주민들 가운데 버마어와 영어를 동시에 구사하는 사람이 몇 명 되지 않았고, 영어를 아는 사람은 또 버마의 이런 전통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나로서는 숙제로 남겨둘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의 공연도 역시 매우 경쾌한 리듬에따라 온몸을 움직이는 열정적인 무대였다.

기타 치는 루퍼트 교장 선생님

 


 

이어진 공연은 교장 선생님의 기타 연주에 맞춰 25명은 됨직한 학생과 교사들의 합창이었다. 버마 노래를 비롯해 잘알려져 있는 외국 포크송을 한국어로 불렀는데 워낙 발음이 ‘버마적’이라 방문단은 잘 알아듣지는 못하고 아는 곡이 나오니까 함께 부르며 신나게 분위기를 맞추었다. 공연이 끝나고 나중에 그 노래가 한국어로 불려진 것을 알았을 때 새삼 민간외교의 큰 의미가 느껴졌다. 적어도 메솟에 사는 사람들에게 ‘한국’은 한번쯤 들어봄직한 이름이 되고 있있다. 기타 치는 교장 선생님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마지막 공연은 3m는 족히 될듯한 대나무 장대를 가로 7개, 세로 6개를 서로 얽히게 놓은채 양쪽에서 3명의 남녀가 양쪽 손에 대나무를 잡고 움직여 준다. 그러면 흰색 원피스를 입은 여학생과 파란색 옷을 입은 남학생들이 그 대나무가 부딪치는 곳을 피해 짚으며 리듬에 맞춰 자리를 옮겨간다. 대나무가 부딪칠 때마다 마치 우리나라 국악 연주에서 음악을 시작할 때나 중요한 변화를 알릴 때는 치는 박처럼 단아한 소리가 났고, 대나무를 옮기는 쪽이나 춤을 추는 쪽 모두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뛰면서 자리를 옮겨가는 모습은 마치 우리의 사방치기놀이와 비슷했다. 순간적으로 ‘실수하면 저 대나무 사이에 끼겠구나’ 하는 생각에 보는 사람의 마음이 조마조마했지만 학생들은 얼마나 연습을 많이 했던지 한번의 실수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이들의 공연에 쓰인 악기는 우리나라의 작은북과 비숫한 밴과 싱와, 대나무로 만들어진 마옹, 그리고 기타가 전부였다. 1970~1980년대 우리나라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나라에서도 기타연주가 유행이었다.

마술을 선보이는 김범용 단장


방문단에서는 별도로 공연에 대한 답례를 준비하지 않아 김범용 대표가 매듭을 이용한 마술을 선보였다. 별 기술이 없어 보이는(?) 김 대표의 인상과는 달리 손을 쓰지 않고 풀려버린 매듭에 모두 감탄하며, 호기심에 번득이는 학생들의 눈빛이 맑게 빛났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공연은 끝나고 드디어 만찬이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재빠르게 밖에 치워놓았던 책상을 공연장으로 옮겨 만찬장을 꾸미고 길게 늘어서 음식을 날랐다. 그런데 이때 전기불이 꺼져버렸다. 전기 사정이 좋지 않은 이곳에서는 매번 겪는 일이라고 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난감해 하고 있을 때 한 대의 버스가 입구까지 들어와 헤드라이트를 밝혀주었다. 갑자기 어디서 가져온 버스일까 궁금해 하며 사진을 찍으려는 찰나, 앞부분에 부착된 태극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랬다. 이 버스는 한국의 지원금 일부로 구입한 메타오의 스쿨버스였다. 한국민들의 정성어린 성금이 고통 받는 아시아의 청소년들에게 빛을 주고, 미래 세계 평화에 기여할 인재 육성에 매우 유용하게 쓰여지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과 감동이 밀려오는 순간이었다.  

 

태극기를 단 메타오고등학교의 스쿨 버스

 

저녁 만찬은 클레밍 부교장 선생님의 정성과 요리솜씨가 그대로 표현된 성찬이었다. 돼지고기 요리와 닭고기 요리, 그리고 죽순을 넣어 볶은 야채 요리, 방문객의 입에는 까칠한 안남미 밥이었지만 모두들 맛있게 접시를 비웠다.  


그리고 아쉬운 석별의 시간. 이제 막 서로에 대해 느낌이 통하기 시작한 방문단과 학생들은 서로 떨어질 줄 몰랐다.


김은혜 운영위원은 우아한(?) 자태로 학생들에게 한국 전통 춤사위를 선보이며, 함께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못내 아쉬워했다. 메타오 학생들에게 다음에는 꼭 한국춤을 선보이겠다고 굳게 약속했다.


한국사회복지공동모금회 진선미 실행위원은 영어를 제법 구사하는 여학생을 발굴, 대화에 아주 신이나 있었다. 여러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대화를 이어가던 그녀는 미야밍꼬(16)라는 한 남학생으로부터 그림 1점을 선물받았다. 엽서 크기에 그린 수채화는 그림에 대한 별다른 지도를 받은 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이에 걸맞지않게 표현이 풍부해 보였다. 전필교 현지 코디네이터의 말을 빌리면 그는 천재적인 소질을 갖고 있지만 지도해줄 사람이 없어 안타깝다고 했다. 

짧은 시간동안 방문단원 각자의 수많은 생각들이 교차돼 지나갔다. 그리고 말이 별로 없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그 천재 화가소년과 기념사진을 찍는 것으로 첫날의 방문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진선미 실행위원은 소리 죽여 눈물을 흘렸고, 그리고 모두 굳게 입을 다문 채 침묵하는 것으로 그날에 대한 표현을 대신하였다.    

 

사진 왼쪽 김범용 단장, 오른쪽은 전필교 현지 코디네이터

천재화가 미야밍꼬와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진선미 실행위원

전통옷을 입은 채 음식을 나르는 여학생 

김은혜 위원과 영어를 곧잘하던 여학생


[덧붙이는 글]


27일 오후 버마 현지에 근무하고 있는 전필교 코디네이터로부터 한 통의 이메일이 도착했다. 2006년 하반기 메타오 고교 운영방안에 관한 것이었다.


우선 난민학교의 지원 목표(Vision)는 버마 군사정부의 우민화 정책의 가장 큰 희생양인 난민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해 훗날 조국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역량을 키우는 것이고, 사업진행과정에서 소중한 우리 국민들의 정성으로 조성된 학교 운영자금을 헛되게 쓰지 않도록 1개월 동안 학교 운영을 지켜본 결과 학생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정보화 교육과 단독 교사(校舍)를 확보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매월 건물임대료로 8천 바트를 지출하는 것보다는 토지를 구입해 건물을 짓는 것이 장기적으로 안정적이고 또 현재 학교건물은 공장용으로 지어진 것을 나무 칸막이를 설치, 5개의 교실로 나누어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방음이 되지 않아 음악수업을 하거나 어느 한 선생님이 목소리를 높이게 되면 다른 4개 학급은 수업에 큰 지장을 받는 실정이다.

또한 간과 할 수 없는 사실은, 학생들의 안전 문제이다. 국경을 넘어온 죄로 이 어린 학생들은 늘 태국 경찰과 군인들에게 쫓기고 있다. 때문에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태국정부로부터 등록허가를 받은 CDC 학교, 메타오 클리닉의 의료요원양성센터와 한 울타리 안에 학교를 짓기 위해 CDC와 그 설립단체인 메타오 클리닉 관계자들과 논의를 진행, CDC 학교 및 메타오 클리닉의 의료요원양성센터와 협력해 세 학교 모두를 위한 부지를 선정했다.

그러나 난민인 버마인들은 토지를 구입할 수 있는 자격이 없기 때문에 TBCAF(Tak Border Child Assistance Foundation) 라는 태국의 NGO 단체와 협력해 그들의 이름으로 토지를 구입할 수 있도록 법적 절차를 추진하고 있다. 토지소유권을 투명하게 하기 위해 구입하게 될 토지는 반드시 버마 난민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 쓰여지게 된다는 서약서를 작성해 책임한계를 명확히 할 계획이다. 다만, 태국법의 특성상 법적 절차가 복잡해 시간을 요하는 상태이다.

토지 구입을 완료하면 세 개 학교가 한 울타리에 건축을 시작할 예정이기 때문에, 전기 및 수도 등 인프라 구축을 위한 비용을 공동부담할 수 있고, 태국 정부의 승인을 받은 학교들과 한 울타리에 있게 돼 아이들에게 조금 더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할 수 있다.


참고로, 메솟에서는 태국 경찰·군인들의 난민들에 대한 횡포가 심각하다. 버마 난민들에 대한 태국인들의 범죄는 처벌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어디에도 등록되지 않은 난민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살인까지도 묵인되며, 목숨을 잃어도 항의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여자 아이들을 납치해 성매매 업주에게 팔아버리는 경우도 있다. 아이들에게 태국 학생들과 같은 교복을 입도록 지원한 것도 이 때문이다.


다음은 아이들에게 시급한 정보화 교육을 위해 컴퓨터 전공 교사를 고용해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컴퓨터수가 턱없이 부족해 최초 계획보다 많은 20대의 컴퓨터 및 프로젝터를 구입할 예산을 신청한 상태이다.


현재 버마인들이 힘이 없고, 독재정권에 강력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무지'이다. 미얀마 정권은 대학생을 선동해 전 국민이 항거하는 일이 발생하자 전국의 모든 학교를 폐쇄한 사례가 있다. 버마 내에서는 인터넷조차 사용할 수 없고 국내에서만 사용 가능한 인트라넷만 허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방송매체 또한 정부의 주문대로 방송을 내보내고 있는 철저하고도 지독한 우민화 정책이다.


따라서 이제 시작에 불과하지만, 한국사회의 관심과 지원은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메솟 난민들에게 한 가닥 희망의 빛이 되고 있으며, 메솟에서 난민을 위한 고등학교는 메타오 고등학교가 유일하다. 학교를 지어 공간과 재정이 허락한다면 12학년까지 개설해 학생들의 대학 진학기회도 마련할 수 있다. 이들이 한국사회의 따스한 손길로 좋은 교육을 받고 보다 나은 조국의 미래를 위해 기여한다면, 훗날 버마가 민주화 되어 예전처럼 부강한 나라가 되어서도 반드시 한국을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