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로, 100년전 독립선언서 미국으로 보내다
민족시인 변영로가 타이핑한 영문 독립선언서 10장의 흔적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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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1일은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선언서가 발표된 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온 겨레가 독립만세로 들끓던 100년 전 그때 그 신춘의 3월, 부천시민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분명 부천에도 시민들의 항일민족운동이 여러 차례 발생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인천 앞바다에서 오류리까지 넓은 면적이 부천군으로 획정되었던 때문인지 현재 부천시로 한정된 지역에서의 항일운동은 생각보다 많은 기록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부천시 근현대사에 대한 연구자들의 무관심도 하나의 이유지만 그보다는 부천시사 복원과 연구자 발굴에 대한 부천시의 적극적인 노력과 지원이 아쉬운 현실이다.
이런 부족한 사료 속에서 우연히 부천이 낳은 민족시인 수주 변영로 선생의 3.1운동 당시 행적을 찾아내게 되었다. 시인으로서만 널리 알려진 선생이 형 변영태 선생과 함께 선언문을 영문으로 번역해 밤새 손수 타이핑을 쳐서 선교사를 통해 외국으로 보냈다는 사실을 부천시민들은 알고 계신가요?
오랫동안 변영로 선생을 연구해온 본지 구자룡 편집주간은 이 대목에 주목하고 자료를 찾던 중 지난 2월 15일 조선일보 이한수 기자는 ‘3·1 독립선언서 영어로 처음 全文 싣고 1면 톱 쓴 하와이 신문(출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2/15/2019021500282.html)’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 영문 독립선언서가 변영로 선생이 타이핑해 보낸 그 선언서일 가능성을 한층 높여주었다.
부천시민신문에서는 올해 창간 10주년과 3.1운동100주년을 맞아 ‘부천(사람)의 항일운동’을 2회에 걸쳐 특집으로 싣는다.
이번호에서는 구자룡 편집주간이 찾아나선 영문 독립선언서를 만들어낸 수주 변영로 선생의 기록과 함께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의 흔적을 찾아 르포로 싣는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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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로 선생의 3·1운동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손병희 선생을 비롯한 33인은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한용운이 선언서 낭독을 마치자 만세 삼창을 부른 후 경찰에 통고해 자진 체포당했다. 이날 정오 12시, 파고다공원에서는 5천여 명이 넘는 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에 나섰으며, 수만의 시민이 이 행렬에 가담함으로써 서울 시내는 만세 소리로 들끓었다.
3·1 운동은 일본의 식민 통치에 맞서 일어난 온 겨레의 항일 민족독립운동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무력으로 통치권을 빼앗고 식민지 정책을 펴면서 온갖 굴욕과 고통을 받은 우리 온 민족은 결연히 떨치고 일어서 이의 부당함을 전 세계에 고발하였다. 이 군중 속에 스물한 살 약관의 부천 출신 변영로 시인이 있었다.
대한공론사 이사장을 맡고 있던 변영로 시인은 1960년, 어린이 잡지 <<새벗>> 3월호 ‘특집 3·1절 이야기‘에 <내가 겪은 3·1운동>-골방에서 독립선언서를 타이프 치던 일-이라는 제목으로 당시를 회고하는 글을 게시하였다. 이 글은 “소년 소녀 여러분!” 으로 시작한 것으로 보아 3·1운동을 잘 모르는 어린이들에게 훈화 차원으로 이야기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겪은 3·1운동-골방에서 독립선언서를 타이프 치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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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소녀 여러분!
내가 이제부터 40년 전, 3·1운동 때의 이야기를 함에 있어서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들로서는 보지 못한 일에 대한 ‘정신으로서의 의식’ 에 관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3·1운동에 관한 일을 그때 친히 본대로 어떠한 윤곽을 잡아서 전부 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분들은 교과서에서 배웠거나 선생님한테 또는 부형에게서 들어 알거나, 혹은 해마다의 기념행사 같은 것에서 보고 느끼는 등, 그 3·1 운동에 대한 상상하는 힘으로서의 인식이 필요하다.
그 상상하는 힘이라는 것은 우리들의 내부(안)의 정신이 외부(겉)에 나타난 것에 의하여 확실히 알고 옳게 이해하려는 기관인 것으로, 그것은 정신의 물질적인 모양을 가진 자연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을 꿰뚫어 알 수 있고, 그러므로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눈을 갖는 것이다.
우선 이쯤 상상하는 일의 준비를 시키고 내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한다.
3·1운동 때, 내 나이는 스물 한 살이었고 YMCA(청년회관) 교사였다. 그러므로 나는YMCA에 나가 있었다. 그날 3·1운동이 파고다공원에서 시작되어 터져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미리는 전연 몰랐었다. 파고다공원과 YMCA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종로는 서울의 한 복판이니 독립선언서가 선포되자 종로의 큰길은 “독립만세…”의 아우성 소리와 사람들이 넘쳐흐르듯 하는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나는 YMCA 소小강당에 몰아넣은 몸이 되어 있었다. 나뿐이 아니라 여러 직원들을 일본 경찰이 몰려와서 우리들을 꼼짝 못하게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잡아가려고 그랬던 것이다. 그때 함께 있던 분들 중에는 윤치호 선생, 뿌락만 씨, 빤하드 씨, 김일선 장로, 구자옥 씨 같은 분이다. 갇혀 있는 소강당 밖으로 엎드리며 거꾸러지며 만세를 부르는 물 끓듯 하는 사람들의 행진과 모자들을 벗어 내던지며 외치는 수많은 학생들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나는 그때, 그 소강당을 빠져나갈 꾀를 한 가지 생각하였다. 그들 경찰은 변소까지 따라와 지키고 있다가 기다려 다시 데리고 가는 바람에 실상 마렵지 않은 대변을 한참 동안 변소간에 들어앉아 있다가 나오곤 했다. 그날 밤 늦게야 석방되었다.
그 훗날이었다. 나는 숙직을 며칠 계속하였다. 그 당시 월남 이상재 선생은 젊은 사람들이 숙직하는 것이 꼴 보기 싫다고 당신께서 내리 붙박이로 숙직하시던 것을 내가 잠시 대신하겠다고 하였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독립선언서의 영어 번역문을 타이프하기 위해서였다. 그 영문 번역은 내 형님이 하였고, 나는 그것을 타이프하여 외국 선교사의 손을 빌어 해외(외국)로 보내고자 하였다.
그 때 타이프는 YMCA 밖에는 없었다. 당시에는 밤 열 시면 전기불이 나갔다. 나는 부총무실에 있는 타이프 앞에 촛불을 켜 놓고 앉으면 무서운 생각부터 났다. 밖은 인적이 없고 고요하기 마치 죽음의 도시 같았는데, 일본 경찰의 말굽 소리와 칼자루가 덜거덕 거리는 소리만이 어쩌다 들릴 뿐이었다. 방의 위치는 북쪽 구석이었으나 밖으로 난 창이 있었다. 불빛이 밖으로 샐까보아 검고 두꺼운 종이로 겹겹이 막아 놓았다.
그러나 타이프를 한 자씩 칠적마다 그것은 마치 벼락 소리처럼 울리었으며 가슴을 때리는 것 같았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왜놈의 경찰에게 발각될까 보아서 공포심에서 이었다. 그리하여 찍다가는 쉬고, 몇 줄 안 찍고서는 또 멈추고 하여 며칠 만에 복사10장을 찍어내었다.
그 다음은 그 영문으로 된 우리 독립선언서를 해외로 보내는 방법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때 종교宗敎, 예배당에 다녔다. 그리하여 미국 사람의 목사인 쩌다인 선교사를 찾아갔다. 나는 타이프로 친 독립선언서를 그 쩌다인 목사에게 주면서 무슨 방법으로든지 외국에 전하여 달라고 하였다. 쩌다인 목사는 본국에 있는 친구 또는 친척에게 전하는 방법으로 우리의 독립 정신은 해외에 알려졌던 것이다.
나의 이러한 일은 33인이나 또는 그 밖의 독립운동의 간부 같은 사람들과 조직적으로 한 일은 아예 아니었다. 그저 자발적으로 우리의 3·1운동을 세계의 여론에 이바지하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내가 어떠한 공명심에서 “나는 이러한 일을 하였다” 싶게 말하려는 것 또한 절대 아니다. 그저 내가 겪은 3·1운동의 한 토막 회상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느껴지는 것은 그때 타이프 친 독립선언서가 한 장쯤 이라도 남아 있었더라면 하는 것이다. <새벗>에서 전재
1958년 3.1운동 40주년 기념 시(詩)
3·1 운동은 일본의 비인도적인 무력과 진압으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러나 일본의 가혹한 무단 통치 아래서도 꺾이지 않는 자주민의 저력을 국내외에 떨쳤고, 세계 여러 나라에 우리나라의 국권 회복 문제를 올바르게 인식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 속에 부천 출신 변영로가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40년 후인 1958년 3월 1일 변영로 시인은 <서울신문>에 ‘회고(回顧) 기미(己未) 3월 1일’이라는 시를 발표하였다.
영원한 우리의 강토
백두, 한라 삼천리의/ 빛나는 우리의 산천-/ 북(北)의 한끝에서/ 남(南)의 한끝은커녕/ 동해 남해 서해/ 크고 작은 섬, 섬마다/ 음속(音速)은 그만 두고/ 광속(光速)보다도 더 빠르게/ 고르게도 퍼지었네/ 만세, 만세의 홑(單-) 외오침/ 아, 하늘과 땅 뒤흔든다!/ 39년 전 그때 그젠/ 광목 한 치의 플라카드도 없이/ 확성기 매단 트럭도 없이/ 머리에 흰수건 매임도 없이/ 어느 뉘 시킴도 없고/ 앞잡이 사람도 따로 없이/ 오래 곪긴 것 터어지듯/ 아쉈던 자유와/ 잃었던 독립 찾는/ 아아 그 불멸의 그 함성/ 거리에 차고/ 더을(野)에 퍼지매/ 골(谷)과 골을 메우다-/ 아아 길이 살아지이다-/ 그때의 그 드높던 정신!/ 아아 다시금 들려지이다-/ 우렁차던 그 불멸의 그 함성!
100년 전, 영문 독립선언서를 타이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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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변영로 시인이 독립선언서를 타이핑하여 세계 만방에 알렸던 서울 종로 YMCA 현장을 다녀왔다. 몰론 본 걸물은 6.25 때 소실되고 지금 건물은 1961년에 새로 건축한 것이다. 100년 전의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 되었지만 아직도 그때의 상황이 생생하다.
YMCA 건물 지하로 들어가 보았다. 변영로를 비롯한 몇몇 인사들이 일본경찰의 감시로 발이 묶여 있었던 곳이다. 그때 변영로는 밖으로 나가보려고 변소를 들락날락 하면서 기회를 엿본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래도 일본 경찰이 물러가지 않자 이번에는 대변을 보는 척하며 변소에서 한참을 쪼그리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경은 화장실 앞까지 따라 붙어 결국 탈출의 기회는 잡지 못했다.
천신만고 끝에 밤늦게 간신히 풀려났지만 다음날, 변영로는 다시 YMCA 회관을 찾아가 스스로 숙직을 자처했다. 그리고는 구석진 사무실에서 촛불을 밝혀 놓고 그것도 밖으로 새나갈까 봐 변변치 않은 종이 쪼가리로 가리고 둘째 형님(변영태卞榮泰 1892~1969)이 번역한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조선我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로 시작하는 독립선언서를 번역한 영문을 숨죽여가며 타이프로 치기 시작했다. 일본 경찰에 들키면 바로 죽음이기 때문이다.
촛불이 밝으면 얼마나 밝으랴, 한자 한자 칠 때마다 어둠속으로 들려오는 천둥 같은 소리에 스스로 놀랐다. 한자 치고 쉬고, 한자 치고 쉬고를 거듭한 끝에, 숨을 죽이며 밤을 꼬박 새워 영어로 된 독립서언서 10장을 만들어 냈다.
지금처럼 1장을 쳐서 복사를 하면 좋으련만, 같은 내용을 10번이나 타이프로 반복하면서 얼마나 공포에 떨었을까? 독립선언서는 한자가 많아 영문 번역이 쉽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변영로가 타이프 치는 실력이 얼마나 숙달 되었는지 모르지만 중간에 오자도 나고 탈자도 나왔으리라 생각된다. 그럴 때마다 다시 치고를 반복해 10장을 완성했다. 말이 10장이지 그 귀함은 100장 아니, 1000장 보다 더 값진 것이었다.
변영로는 영문으로 타이핑한 <독립선언서>를 들고 삼엄한 일경의 경계망을 뚫고 같은 교회에 다니는 미국인 선교사 쩌다인을 찾아갔다.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건네주며 조선의 독립을 세계 만방에 알려달라고 간절히 부탁하였을 것이다. 스물 한 살의 청년 변영로가 이룩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렇게 대한민국의 독립선언서가 세계적으로 알려졌던 것이다. 본인은 공명심 때문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 일은 독립운동을 이끈 조직이나 인물들과는 상관없이 자발적으로 한 것이라는 서술에서 그의 뚜렷한 민족의식이 여실히 느껴진다.
특히 변영로가 “술을 많이 마시고 늘 취해 있었다”는 증언처럼 술로 세월을 보냈는 줄 알았는데, 교회를 다녔다는 사실은 새삼 놀라운 일이다. 안타까운 것은 변영로 선생이 말씀하셨듯이 영문으로 번역된 독립선언서를 1장도 남겨놓지 않아 실증 자료가 없다는 것이다. 아마, 그 이유는 1장이라도 더 외국 선교사에게 전달하여 우리의 사정을 세계 만방에 알리고 싶었던 변영로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영문 번역은 변영로의 형님인 변영태 선생이 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가 ‘독립선언서’를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에 대해서도 서술하지는 않았다. 독립선언서는 지금의 서울 종로구 수송동(세종문화회관 뒤)에 있던 보성사에서 인쇄를 했다. 그리고 종로구 수운동 천도교당 앞에서 무료로 배부를 했다. 지금의 낙원상가 뒤쪽 수운회관 앞에 가면 기념 푯돌이 있다.
이런 일화가 있다.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다가 고등계 형사 신승희에게 발각되었다. 그는 친일파였는데 손병희 선생의 설득으로 눈을 감아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천도교회당으로 옮기는 도중 일본 경찰의 검문에 걸렸는데 그때 마침 정전이 되는 바람에 무사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하늘이 도운 것이다.
뒤바뀐 鮮朝와 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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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MCA 회관을 나와 이번에는 만세소리 요란했던 파고다공원을 찾았다. 걸어보았자 10여분도 안 걸리는 곳이다. 몰론 이곳도 100년 전의 흔적은 하나도 남은 것이 없다. 하지만 ‘대한독립 만세’ 그 함성소리는 아직도 쟁쟁하게 귓가에 맴돈다.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다. 정문 오른쪽에 세운 3·1 운동 기념탑 옆 좌대에 독립기념관에 보존돼 있는 선언서 모사본을 전시해놓았는데 “吾等은 玆에 ‘我鮮朝’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라고 적혀있었다. 유심히 보니 ‘朝鮮’이 ‘鮮朝’로 돼있다. 마침 그곳에 계시던 한 어르신은 3년 전, “잘못된 것을 알고 바로잡아야 한다고 여러 사람에게 말했는데 귀담아 듣는 사람이 없다”고 안타까워하였다.
교과서에에서 독립선언서를 공부할 때 단 한 번도 ‘鮮朝’라고 하지는 않았는데…. 다음날 바로 독립기념관에 확인해 본 결과 원문 표기가 그렇게 돼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 인쇄과정에서 식자를 잘 못한 것인지, 원본 자체가 그런지…. 최남선 선생이 쓴 초고가 남아있지 않아 이 역시 확인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 ‘朝鮮’으로 되었을까? 그 어디에도 ‘鮮朝’가 ‘朝鮮’으로 바뀌었다는 설명은 없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한번쯤 밝힐 만도 한데,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또 하나 독립선언서의 진짜 이름은 그냥 ‘선언서宣言書’이다.
힘차게 삼일절 노래를 불러본다, 얼마만인가 가슴이 벅차오른다. 3월 1일, 그날은 일본에 의해 독살된 고종의 장례식을 치루는 날이기도 했다. 정오 12시,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지에서 동시에 독립선언식이 이루어짐으로써, 전국적인 민족해방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3·1운동이 일어나던 당시 우리의 살림은 매우 어려웠다. 그 흔한 광목쪼가리의 플랜 카드(지금의 현수막)도 없었단다, 머리에 수건 맨 사람도 없었다. 확성기를 맨 자동차는 사치였을 것이다. 모두 맨몸으로, 맨손으로, 맨 목소리로, 목이 터지도록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일본 측이 발표한 3월 1일 이후 전국을 휩쓸었던 3·1운동 상황을 보면, 집회 횟수 1,542회, 참가인원 202만3,089명, 사망자수 7,509명, 부상자수 1만 5,961명, 피검자수 5만2,770명, 불탄 건물은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나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은폐 축소된 숫자일 뿐, 그 수는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아직까지도 한일 감정이 남아 있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동안 수도 없이 왔다 갔다 했던 종로 거리, 파고다공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이날따라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겨울을 견딘 봄이 저만치서 오고 있는데, 왜 자꾸 옷깃이 여며지는 것일까? 거리는 벌써 불야성을 이루고, 100년 전 그 날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은 분주하다.
100년 만에 나타난 영문 독립선언서
취재를 마치고 기사를 정리하면서 온몸이 오싹하는 아주 중대한 자료를 발견했다. 100년 전 3월 어느날, 변영로가 YMCA 건물 지하에서 숨죽여 타이핑 했다는 그 영문 독립선언서로 추측되는 자료가 발견된 것이다.
지난 2월 15일자 조선일보 문화면에 <Korean Independence Declaration Bared-한국의 독립 선언이 드러나다> ‘애드버타이저 지면 첫 공개’ 라는 기사가 바로 그것이다. 조선일보 이한수 기자가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장을 인터뷰한 기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19년 3월 28일 하와이 대표 일간지 ‘퍼시픽 커머셜 애드버타이저’(이하 애드버타이저)는 1면 톱기사 제목을 이렇게 뽑고, 1면 거의 전면에 걸쳐 3·1운동을 비롯한 한국의 독립운동 소식을 전하고 영문으로 번역한 기미독립선언서 전문을 실었다. 독립선언서 영문 번역 전문을 보도한 것은 이 신문이 처음이다.(중략)애드버타이저가 3·1독립선언서 전문을 실은 때는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난 뒤 27일 지난 때였다. 샌프란시스코 한인단체인 국민회가 발간한 한글 신문 ‘신한민보’는 4월 8일자에 영문 독립선언서 전문을 실었다. 신한민보가 실은 영문 독립선언서는 애드버타이저 독립선언서에서 오타만 수정했을 뿐 완전히 같은 번역문이다. 애드버타이저가 실은 독립선언서는 이후 영문 번역 독립선언서의 원형이 됐다.(하략)
조선일보 기사는 애드버타이저는 영문 독립선언서를 어떻게 확보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이덕희 소장에 의하면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발행되는 신문 ‘새크라멘토 비(Sacramento Bee)’의 발행인 맥클랫치를 애드버타이저가 3월 27일 인터뷰하면서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그러니까 맥클랫치는 한국에서 영문 독립선언서를 갖고 배를 타고 미국으로 돌아가던 중 3월 27일 호놀룰루에 들러 애드버타이저와 인터뷰를 했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맥클랫치는 3·1운동 당시 한국을 방문 중이었다가 현장을 목격했고, YMCA 관계자로 추정되는 미국인으로부터 영문 번역한 독립선언서를 받았다”는 부분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영문 독립선언서를 건네준 사람이 “YMCA 관계자로 추정되는 미국인”이라는 것이다. 변영로는 당시 YMCA에서 영어강사를 했고, 또 그 곳에서 독립선언문을 타이핑을 하여 같은 교회를 다니던 미국 선교사에게 전해 주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1919년 3월 하와이 신문 ‘퍼시픽 커머셜 애드버타이저’에 실린 영문 독립선어서는 변영로가 타이핑한 것일 기능성이 높다.
지난 22일 (사)3·1정신조선광문회복원위원회가 주최한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에서 김도형 독립기념관 연구위원은 <3·1독립선언서의 국외 전파>란 발표에서 “3·1운동 기간에 변영태·변영로 형제가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한 것만은 분명하다”며 “선교사를 통해 해외 선교기관에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주장했다.
김 연구위원은 “서울 경신학교 교장 쿤스가 미국 장로교 해외선교부에 보낸 ‘영문 독립선언서’가 바로 변영로 선생”이 타이핑 한 것으로 추측하면서 “최남선이 쓴 3·1독립선언서의 본래 내용을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도저히 영어로 번역이 불가능할 정도로 세밀한 내용까지 번역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변영로의 항일운동 조명 과제
변영로 선생이 타이핑한 것으로 추정되는 ‘영문 독립선언서’가 수록된 신문을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100년 세월 동안 머나먼 이국땅에서 잠자고 있었을 ‘독립선언서’. 추측이 사실이 되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려본다.
수주 변영로는 우리 부천이 낳은 민족 시인이다. 조선의 혼마저 위태로웠던 일제강점기 속에서 이상향으로 시 세계를 선택하여 저항의식을 끈질기게 내면화하였다. 뿐만 아니라 창씨개명은커녕 단 한 줄의 친일문장도 쓰지 않아, 한국을 대표하는 민족 시인이요, 저항시인이다.
2019년 3월, 민족 시인으로서 만이 아니라 항일민족정신을 몸소 실천한 항일 애국운동가로서 수주 변영로 선생에 대한 연구가 더욱 진척되기를 기대하면서, 100년 만에 새롭게 드러나는 선생의 나라 사랑 겨레 사랑 민족정신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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